잠시 다녀 온 판타지 세계, <제 1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올해에도 어김없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PiFan)에 다녀왔다. PiFan은 그 이름에 걸맞게 판타스틱fantistic한 영화들을 중점으로 한 영화제여서, 잠시 일상을 탈출해본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다. 뭐, 영화의 주제 뿐만 아니라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각국의 뛰어난 감독들의 말 그대로 판타스틱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고. 시간적 여건으로 늘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이번에는 특히나 영화 예매를 할 때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탓에 보고 싶었던 영화도 놓치고, 개/폐막작 중 어느 것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못내 마음아프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제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몇 가지 있었는데,
1. 처음으로 야외/심야 상영과 판타스틱 콘서트를 노리고 하룻밤을 부천에서 보낼 각오를 하고 갔는데, 비가 와서 취소된 것! 아아아.
2. 왜 아직도 유진이 피판레이디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에 찝찝한 마음. 뭐, 피판 가이보다야 낫지만.
3. 이건 뭐 B급 영화도 아니고 유치의 극치를 달리는 공식 트레일러trailer. 영화 볼 때마다 앞에 틀어주는데, 그 때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푸훗'에 동참했다. 한편으론 '도대체 이 영화제 오는 사람들 수준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아래부터는 관람 순서에 따른 짤막한 리뷰들.
타임크라임Timecrimes

국가: 스페인
제작년도: 2007년
상영시간: 89분
타임크라임은 SF의 전형저인 소재인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다. 어느 날 문득 집 앞 마당에서 망원경으로 주변 경치를 보던 헥터는 한 여인의 나체와 기괴한 형상을 한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을 쫓아들어간다. 그 때부터 시작하는 하루 동안의 악몽 속에서 빅터는 같은 시간대에 몇 개의 인격으로 분리되어 서서히 변해간다. 나를 쫓는 나, 나에게 쫓기는 나.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SF영화들은 시간여행 패러독스와 그로 인한 모순을 염두해두기 마련이다. 때문에 일부러 먼 시간을 여행하거나, 과거, 혹은 미래의 자신과의 만남을 극도로 기피하거나하는 식이다. 그런데 <타임크라임>의 시간여행은 고작 하루. 저녁에서 오후로 이어지는 아주 잠깐 동안의 뒤틀림이다. 하지만 그 뒤틀림 때문에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인생을 살던 평범한 헥터는 점차 시간의 카오스로 빠져들고, 이를 헤쳐나오기 위해 변해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재미는, 시간여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소재를 극도로 살렸다는 점, 그리고 하나의 사건을 여러가지 시점으로 바라보면서 점점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들의 스릴과 공포이다. 만 하루라는 짧은 시간 여행을 통해 이 두가지 소재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감독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벤 X Ben X

국가: 벨기에
제작년도: 2007년
상영시간: 90분
여기 한 왕따가 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이 소년은 늘 급우들의 놀림의 대상이 된다. 녀석들은 그를 '화성인'이라고 부르며 그를 괴롭힌다. 선생님에게 이르면 국물도 없다는 조언을 꼭 덧붙이며. 물론 그도 수치스럽고, 분노를 느낀다. 칼로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지만 그를 생각하는 다른 친구 덕에 뜻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갖는 '인간 관계'를 학습하고자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평범한 사람들을 촬영하지만 스스로도 그것을 학습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엄마가 다그쳐야만 마지못해 몇 마디 말을 쭈볏쭈볏 꺼내는 이 소년. 이 소년이 유일하게 정상인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 그네들보다 더 우수한 힘과 기술을 자랑할 수 있는 곳은 다름아닌 온라인 게임 속이었다. 춤을 추고,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도움을 받는.
시종일관 과거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 사이사이에 그의 어머니, 급우, 그를 도우려 했던 친구와 선생님들의 인터뷰가 끼어든다.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인터뷰 장면과 같다. 모두들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뱉는다. 안타깝다. 우리가 좀 더 도와주어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래서 죽음이 필요한 거에요. 누군가 죽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테니까요.'라는 말은 우리에게 벤의 비극을 암시하고, 또 그로 인해 끊임없는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자신의 하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는 것을 보고 현실과 온라인 게임 속에서의 정체성의 충돌이 더욱 심해진 소년. 급우들이 몹mob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자신은 아무런 장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전사가 된다. 힘겹게 도구를 장착하고 몹에게 공격을 시도하지만 실패. 오히려 더 가혹한 짓을 당하게 되고, 심지어 친구들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그녀'를 만나는 것을 방해하려 하자 소년의 분노와 좌절감은 극에 달한다.
보통의 영화, 기사, 뉴스 등에서 온라인 게임의 폭력성이나 시쳇말로 온라인 게임 폐인들의 모습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해, 이 영황에서는 주인공 소년 벤이 온라인 게임으로부터 자신의 분노,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매우 인상깊다. 온라인 게임은 이미 자신의 세계의 일부이며, 현실과 온라인 게임 속에서의 자아의 충돌이 서서히 융합되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감독이 가지고 있는 비상함에 절로 박수가 쳐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감독이 밝혔듯,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 무엇보다 가장 공포스럽다.
시암의 사랑The Love of Siam

국가: 태국
제작년도: 2007년
상영시간: 158분
감독은 사랑을 무언가의 부재를 채워줌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을 영화 내내 강조한다. 퉁의 누나 탕의 부재, 그리고 퉁이 뮤에게 선물한 인형의 한 부분(코)의 부재. 이 부재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남으로써 둘의 사랑은 완벽한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사랑이 꼭 아름다운 해피엔딩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하지만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감독은 '사랑이 있는 한 희망은 찾아온다'고 했고, 영화의 엔딩에서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랑들에게'라고 할 정도로 사랑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보였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은 희망이라기보다 절망에 가까웠는걸. 내 눈엔 누구 하나 행복해지지 않았어. 심지어 뮤에게 온 정성을 다한 잉마저도.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은 탕의 부재를 인정하고 앞으로 헤쳐나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은 퉁의 가족들 정도? 난 적어도, 잉과 뮤라도 잘 되길 빌었단 말야.
길바닥 스타The Reinactors

국가: USA
제작년도: 2008년
상영시간: 95분
할리우드의 길에는 이토록 많은 캐릭터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람들에게 기념촬영을 해주고 그들이 주는 팁tip으로 돈벌이를 하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음 다큐멘터리 영화.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The Glorious Team Batista

국가: 일본
제작년도: 2008년
상영시간: 128분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단 두가지. 요즘 <의룡>덕에 알게 된 바티스타라는 수술법을 실사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리고 또 하나, 저놈의 아베 히로시! <TRICK>과 드라마 <히어로>에서 봤던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깐죽 매력을 가진 이 배우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 아, 물론 아베 히로시 옆에 있는 다케우치 유코가 왠지 나카마 유키에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것도 한 몫 하긴 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메디컬 추리물이다.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라는 이 영화는, 어느 날부터 유능한 바티스타 수술팀의 수술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섬찟한 진실을 그리고 있다.
비대해진 심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고난도의 수술이니만큼 애초에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큰 의심이 없이 수술 과정을 조사하는 다구치(다케우치 유코 분). 결국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원인 불명'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놓고나자 갑자기 나타난 후생성의 시라토리(아베 히로시 분).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살인의 그림자.
사실 이 영화는 추리물임에도 불구하고 추리에는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실 시작이 '별거 아닌 수술의 어려움에 따른 실패가 아닐까'였기 때문에 초반부터 긴장감을 느끼긴 어렵다. 그렇기 때문인지 초반에는 다쿠치 선생의 우왕좌왕하며 실수를 연발하거나 천연덕스럽게 환자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모습, 그리고 시다토리의 듣는 사람 '욱'하게 만드는 말빨에 상당한 비중이 있다. 하지만 살인의 징조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추리물로 비중이 옮겨가야 할텐데, 그 타이밍과 비중이 약간 어긋나지 않았나 싶다.
뭐, 그래도. 아베 히로시와 쿵짝이 잘 맞는 다케우치 유코의 연기에 웃다 진지해지다 웃고 나왔으니, 그걸로 만족.





댓글
2008/07/29 00:00
옹, 다녀오셨고만! 지금 기록하는 걸 보니 자네 요즘 바쁘긴 바쁜갑다 싶어지네 ==
2008/07/29 10:15
아, 오죽하면 내가 야근B를 끊겠냐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