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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군의 문화와 인터넷 이야기.
배트맨 이어 원 - 10점
데이비드 마주켈리.프랭크 밀러 지음, 곽경신 옮김, 리치먼드 루이스 그림/세미콜론
DC 코믹스에서 잡지 형식으로 매주 발간하는 <배트맨> 404~407호의 연재분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이번에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이어 원>은 미국에서도 2005년 새로 나온 양장본 디럭스 에디션.

<배트맨 이어 원Batman Year One>은 영화 시리즈로 치자면 <배트맨 비긴즈> 격이다. 책의 서문에 보면, <배트맨 이어 원>은 DC코믹스에서 자신들의 영웅들을 쇄신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프로젝트에 프랭크 밀러가 참여하면서 배트맨은 보다 디테일하고 현실적이며 다양한 고민을 끌어안은 독특한 영웅이 되었다.

사실 <배트맨 이어 원>은 배트맨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브루스 가의 강도 사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브루스 웨인이 가진 박쥐에 대한 공포감이나,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임팩트 있는 장면으로 그려지지만 생각만큼 중요한 흐름을 가지진 않는다. 배트맨이 탄생하고 첫 1년 동안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지만, 특이하게도 배트맨보다 오히려 고든 부서장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애초에 영웅이라는 것은 누군가 그렇게 불러주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초현실적인 히어로들, 예를 들자면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 같은 경우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 모습이 영상으로 극대화 된 것은 아무래도 스파이더맨일 터인데, 그는 악당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저 소소하게 때로는 너무나 절박하게 피자 배달을 하면서 생활을 근근히 이어가야 하는 소시민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들은 악당에게 고마워해야 할 판이다.

배트맨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초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이다. 단지 조금 돈이 많아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수 많은 기계들을 자체적으로 연구, 개발,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1. 슈퍼히어로들 조차 악당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저 시민에 불과할 뿐인데, 애초에 특별한 힘 하나 없었던 배트맨은 오죽하겠는가. (내부적으로 얼마나 부패했건 간에) 법치국가에서 경찰등의 공권력을 무시하고 스스로 벌을 내리는 어둠의 존재를 어느 정부와 조직이 곱게 봐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여러 의미에서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쉽게 그러한 존재를 긍정할 수 없다. 오히려 무법자, 혹은 범법자라는 이름을 붙여 잡아들이고 싶어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 언제였을까, 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배트맨과 고든 서장이 우정을 쌓기 시작할 때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지지하고 그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외적인 존재가 있어야만 배트맨은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배트맨 이어 원>은 배트맨의 고뇌보다, 고든이 배트맨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심리적 묘사가 더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정의를 지켜야 하지만 가장 부패한 조직인 경찰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것, 에센 경사와의 불륜, 조금만 정의로운 일을 하려고 하면 들어오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압력과 협박, 모든 것들의 경계가 모호하고 흐트러져 있다. 수없이 괴로워하는 그가 배트맨이 차에 치일 뻔한 할머니를 구하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경찰들의 포위망 속에서도 고양이를 구하며, 심지어는 도망가는 와중에 아무도 없는 양복점에서 변장용 옷을 훔쳐가면서도 돈을 지불하는 모습을 봤을 때, 과연 그를 붙잡아야 하는가,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고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터였다.

<배트맨 이어 원>은 배트맨의 탄생이라기 보다는 배트맨이라는 정체성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결국 고든이 배트맨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배트맨은 영웅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고든은 좀 더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 있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고든, 당신 덕분에 배트맨이 배트맨일 수 있게 되었어. 내가 그래서 당신을 좋아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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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슷한 예로 <아이언 맨>이 있으시겠다. [Back]
2010/01/20 00:01 2010/01/20 00:01
배트맨 :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 - 8점
프랭크 밀러 글 그림, 린 발리 채색, 이규원 옮김/세미콜론
프랭크 밀러가 <이어 원>이후 15년 만인 2001년 공개한 배트맨 3부작의 완결편.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속편 격이다.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현대 사회에 대한 냉철한 시선은 더 날카로워졌고, 작품의 스케일은 더욱 커져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든다.

지난 번 <다크나이트 리턴즈>의 후속편이다. <다크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은 몇 가지의 사건과 문제를 해결 한 후, 죽음을 가장해 몸을 숨기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수 많은, 특히나 DC 유니버스의 히어로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히어로는 이제 나이를 먹고 기력이 쇠한 노인이 되어가기 때문이었다. 너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인지라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던 <다크나이트 리턴즈>의 결말이었다.

그 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암울한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담시의 모습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렉스 루터 박사와 브레이니악에 의해 미국은 완전히 점령되었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컴퓨터 캐릭터가 미국의 대통령 노릇을 했고, 모든 정보는 통제되었다. 사람들이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무기력하게 자신들의 삶에 익숙해져 가고 수 많은 히어로들이 각종 수감시설에 수용되거나 노리개가 되어 있었다. 칸도르1가 인질로 잡혀 렉스 박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슈퍼맨, 발전기에서 전기를 돌리기 위해 햄스터처럼 끊임없이 달리기만 해야 하는 플래쉬, 생물병기 취급을 받으며 배양기 속에서 살아야 했던 아톰, 희망을 잃어버린 건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히어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만 전념하고자 했던 그가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고자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히어로들을 구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주고, 렉스 박사를 무찌르는 그는, 남겨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왜 배트맨은 다른 사람들, 혹은 히어로들처럼 그저 현실에 수긍하고 살지 않고 굳이 되돌아와 그 힘든 몸을 이끌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는가.

다음 세대.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로 잡은 올바른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주기 위하여. 그의 세대를 대표하던 배트맨 스스로와 슈퍼맨이 함께 말한다. "나의 시대는 끝났다."고. 그리고 그의 숨겨진 의도는 엉뚱하게도 슈퍼맨의 딸인 라라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 시대는 우리의 것. 이 세계는 우리의 것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배트맨은 다시 돌아옴으로써 자신의 세대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다름 세대에게 타이즈를 넘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사건이 정리되어가는 과정에서, 배트맨 특유의 분위기 보다는, 마치 우주 전쟁과 같은 분위기가 더 강하고, 그래서 오히려 배트맨보다 다른 히어로들에게 눈이 많이 가는 시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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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크립톤인 천만명이 살고 있는 일종의 미니 도시. [Back]
2010/01/19 00:54 2010/01/19 00:54
배트맨 Harvest Breed - 6점
조지 프랫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배트맨, 본명은 브루스 웨인. 고담 시 제일의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하다. 그의 참모습은 고담 시의 밤거리를 누비며 어둠 속에 기생하는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히어로 ‘배트맨’이다. 어린 시절 권총 강도의 손에 부모를 잃은 브루스는 일생을 범죄와의 전쟁에 바치기로 맹세하고 스스로를 극한까지 단련하여 고담 시의 평화를 지키는 복수귀로 거듭난다. 다년간의 수행으로 익힌 무술 실력과 부모의 유산을 이용하여 개발한 과학 장비를 총동원하여 범죄와 싸운다. 그는 뛰어난 추리력과 해박한 지식을 갖춘 명탐정이기도 하다.

놀랐다. 솔직히 <배트맨 Harvest Breed>를 보면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 시리즈에 내가 아는 배트맨은 없고, 오컬트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는, 흡사 <베르세르크>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알고 있던 배트맨의 고뇌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악마에게 휘둘리는 배트맨과 고담시가 눈 앞에 펼쳐질 뿐이다. 당황스럽다. 아무리 DC 유니버스의 세계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판타지, 그것도 오컬트로 빠진 시리즈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물론 배트맨은 멋지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사건을 해결하고, 고든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우정을 보이지만,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이제까지 내가 쌓아 온 배트맨의 세계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베트남전에 참가해 의문의 연인으로부터 신비한 힘(손을 댄 사람을 치유할 수 있고, 더불어 그 사람이 죽을 운명을 볼 수 있는.)을 얻은 부르도 박사, 신비한 예지력과 유체이탈 능력을 가진 그의 딸 루시, 그리고 그의 아내, 시실리. 그/녀들이 한데 얽혀 있는 악마와의 전쟁...

그림이야 멋있는데, 글쎄, 이거 배트맨 맞나? 싶은 느낌이 계속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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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01:33 2010/01/18 01:33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 1 /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 2 - 10점
프랭크 밀러 외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1986년 2월부터 6월까지 4호에 걸쳐 ‘4부작 미니 시리즈’로 기획된 <다크 나이트 리턴즈> 는 배트맨 시리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팬들의 필독서다. 배트맨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한국의 배트맨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가장 읽고 싶은 배트맨 만화로 손꼽혀왔다.

그랬다. 사실 참으로 궁금했다.<다크 나이트 리턴즈>라. 왜 '리턴즈returns'가 붙지? 진짜 배트맨 팬들이 들으면 화를 펄펄 낼 생각이었던게다. 이 시리즈로 인해 퇴색되던 배트맨의 매력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후의 시리즈들이 나오는 원동력이 되었을 정도로 일대 획을 그린 작품을 놓고 제목에 갸우뚱거리고 있었으니. 그래도 어쩌겠나, 배트맨 시리즈가 시작되었을 때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고, 어릴 때에는 인터넷이고 뭐고 없었을 뿐더러, 나는 부모님 몰래 만화를 봐야 하는 말 못할 슬픈 고민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년이었을 뿐인걸.

<다크 나이트 리턴즈(이하 DKR)>의 시작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배트맨이 은퇴를 하다니! 돈 많은 아저씨가 은퇴하고 나서 무기력에 휩싸여 어떻게 죽는게 가장 바람직한 모습인가 따위를 고뇌하고 있는 브루스 웨인이라니! 어디 상상이나 했겠나? 사실 슈퍼히어로물이라는 게 영웅은 언제나 나이를 먹지 않음을, 혹은 시간이 흘러도 아주 조금만 흐르거나, 한창 활동할 전성기의 모습을 그리는 게 당연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다 늙어 체력이 골골거리는 브루스 웨인이라니. 이거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충격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헷갈리기는 하네.

사실 생각해보면 배트맨은 생각처럼 '슈퍼'히어로는 아니지 않나. 슈퍼맨처럼 외계인(막상 이렇게 쓰자니 슈퍼맨에게 조금 미안해지기도 하네. 하지만 클라크, 자네 엄밀히 족보 따지면 외계인 맞아.)도 아니고, 스파이더맨처럼 거미한테 물린 적도 없고, 심지어 저 막장 히어로인 핸콕처럼 신과 비슷한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고 X-MEN들처럼 초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돈이 써도 써도 모자랄 정도로 -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 정도로 많은 한 보통 남자가, 수많은 지식과 탐정술, 엄청난 노력으로 얻어 낸 체력과 무술, 그리고 돈과 기술로 무장한 각종 장비들을 들쳐 엎고 다니는 것일 뿐이다. 다른 히어로들과는 달리 배트맨은 늙고, 병들고,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 우리처럼. (다른 히어로들도 그럴 거라고 100번 생각하면 한 번쯤 설득당하겠지만 왠지 그럴거라는 느낌이 잘 안 든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인지 <DKR>에서 나오는 배트맨은 이제까지 영화에서 봐 온 그런 히어로의 모습이 아니었다. 좀 더 인간적이었다. 슈퍼히어로들이 시리즈에서 보통 겪는 고난 - 악당이 나타나 세계를 정복하려 드는 -과 달리, 배트맨의 고난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이었다. 그의 존재는 정의를 기저로 삼고 있지만 법과 도덕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그것은 더욱 강한 적들의 등장이라는 모순점을 늘 끌어안고 있다. 배트맨을,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자경단원들에 대한 합법성 여부가 언론에서 끊이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영화 <다크나이트>를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란 얘기다. 기본적인 설정이랄까 세계관이랄까, 그런 것들은 <DKR>과 <다크나이트>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 그리고자 했던 배트맨의 양면성은 동일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배트맨에게 빠져든 매력이기에, 나는 일단 두 사람 모두에게 엄지 손가락을 우뚝 세워준다.

그런데 사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놀란 감독이 조금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DKR>의 브루스 웨인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사람이기에 언젠가 해야 할 은퇴를 한 경우이지만, <다크나이트>는 그렇지 않잖은가. 아, 괜히 배트맨에게 주지 않아도 되는 시련을 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캐릭터를 향한 엉뚱한 팬fan심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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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1 23:19 2008/11/01 23:19
다크나이트
원제: The Dark Knight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아론 에커트, 게리 올드만, 마이클 케인, 매기 질렌홀, 모건 프리먼
배급사: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상영시간: 152분
상영시간: 2008.08.06

<배트맨 비긴즈>는 신선했다. 여느 다른 히어로물과 달리 주인공 - 배트맨의 탄생에 있어 오는 다양한 심리적 갈등과 고뇌에 초점을 맞추었었다는 점이 내게는 신선했고, 또 그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답다고 생각했었다. 이전 배트맨 시리즈 역시 재미 있었지만,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초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지난 배트맨들은 약간 판타지성이 강했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좀 더 모던modern해진 느낌이어서, 정말 고담시 어딘가에 브루스 웨인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번 <다크나이트>에서는 정말 당장 박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동굴에서 벗어나 최첨단 시설로 갖추어진 배트맨 동굴의 모습이나, 람보르기니를 타고 도시를 질주하는 모습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준다1.

처음엔 <다크나이트>가 부제인 줄 알았다. 당연히 제목은 '배트맨'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감독은 굳이 배트맨의 별명인 '다크나이트'를 타이틀로 걸었던 걸까?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이전 시리즈물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이려나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자 이건 완전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아, 그래서 '다크나이트(밤의 기사)'를 제목으로 썼구나.

조금만 검색해보면 요즘 <다크나이트>는 블록버스터물의 평가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나도 물론 이 영화에 엄지손가락 두 개 정도야 가뿐하게 올려줄 수 있다. 왜일까? <다크나이트>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라고 하면 그저 치고 박고 싸우는 액션씬에, 얼마나 호쾌하게 셋트를 날려버리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편견을 한 방에 날려주었다2. 화려한 액션과 셋트장, 관객들의 눈이 돌아가게 만드는 각종 아이템들을 뒷받침하는 건 무엇보다 탄탄한 이야기구조와 그 속에 담긴 드라마다.

보통의 히어로물이 갖는 고뇌는 대게 '히어로, 혹은 슈퍼 파워super power는 존재한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그나마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들추었던 것은 <스파이더맨> 정도였는데, 스파이더맨이 가진 고민 - 엄청난 힘에 뒤따르는 책임감 - 은 배트맨의 고민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민다. '영웅의 존재.' 자, 과연 영웅이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혹 주변에 영웅이 활동하고 있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해보자. 도대체 이 또라이는 왜 이런 질문을 할까? 하는 눈빛이 되돌아올 것이다. 사람들은 영웅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가 악당과 싸워 이겨주기를 원한다. 그럼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워질 거고, 그걸로 해피 엔딩. 자, 그럼 왜 그 수많은 히어로물의 시리즈들은 끊이지 않고 나오면서 히어로들을 좀 편하게 쉬게 하지 못하는 걸까?

예전에 <핸콕> 리뷰를 쓰면서 이런 문장을 남긴 적이 있다.

물론 슈퍼 영웅의 이름을 콕 찝어 들먹거리며 맞짱을 뜨자고 쌩난리를 치는 악당들의 존재는 잠시 잊어두자. 애초에 슈퍼 영웅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조용히 살았을지도 모를 녀석들이니.

어쩌면, 어쩌면 영웅이 없었더라면 대악당들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히어로물들을 되새겨보면, 보통 히어로의 탄생/각성 - 대악당의 출연 - 결투 - 정의의 승리 구도를 쫓아간다. '그게 뭐?'라고 물으신다면, 생각해보자. 첫 고리인 '히어로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대악당이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크나이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영웅의 존재에 대한 의문. 과연 영웅이 온 힘을 다해 악당들을 소탕하면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평화로운 날이 올 것인가?

<다크나이트>의 대답은 'No.'다. 단순히 배트맨이 '어둠'을 선택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필요악'의 존재를 인정하며, 지지하는 모습까지도 보인다. 배트맨(크리스찬 베일 분)과 하비 검사(아론 에커트 분)가 고담시의 악당들을 말 그대로 '싹쓸이'하려고 하자 조커(히스 레저)는 악당들의 대장들을 그의 방식대로 소집해 배트맨에게 대항한다. 알프레드(마이클 케인 분)가 웨인에게 '선을 넘지 말라do not cross the line.'고 충고했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적당히 소탕해서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는데, 너무 과했더니 오히려 달려든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의 콧잔등을 물었다. 그런데 이 쥐가, 죽을 힘을 다해 물으니 고양이가 주춤한다.

도시에 영웅과 악당의 공존이 불가피한 것은, 인간의 내면이 근본적으로 선악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배트맨은 평화로운 고담시를 위해 거짓과 위선을 선택하고, 하비 검사는 투페이스가 된다. 조커의 함정이었던 보트 게임에서 악인들과 보통 사람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배트맨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경찰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선악의 경계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이고,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적절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알프레드마저도 웨인에게 진실을 숨기지 않았는가. 심지어 조커는 '같이 놀기 위해' 기회가 있음에도 쉽사리 배트맨을 죽이려 들지 않는다. 완전한 악당의 소탕, 완전한 정의는 꿈과 희망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걸 굳이 되새겨준다. 아, 참 멋진 감독이다, 크리스토퍼. 이 사람은, 인간의 양면성을 극대화시켜 영상으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 하다. <메멘토>에선 그런 모습이 강하게 어필된 것은 아니지만, <인썸니아>에서는 얼마나 섬찟했었나.

빛이 있기에 생기는 어둠. 그 어둠 때문에 더 밝아지는 빛. 마치 <매트릭스>를 연상케하는 철학적 문제로의 도전.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슈퍼 히어로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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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론 한편으론 부럽다. [Back]
  2. 물론 이전에 <매트릭스>(워쇼스키 형제 감독, 1999년)도 있긴 했지만. [Back]
2008/08/20 01:53 2008/08/20 01:53
배트맨 허쉬 1 / 배트맨 허쉬 2 - 8점
밥 케인 원작, 제프 로브 글, 스콧 윌리암스.짐 리 그림, 박중서 옮김/세미콜론
2003년 미국 만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 이후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배트맨 만화라는 평을 들은 바 있다. 스토리작가인 제프 로브와 밑그림을 그린 재미교포 작가 짐 리의 환상적인 호흡이 이 작품을 근래 DC 코믹스 최대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깔끔한 화면 분할과 빠른 전개, 역동적인 묘사는 만화로 읽은 액션 영화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예전에 PiFan에 갔을 때, 장르문학페어Fair가 부대 행사로 진행되고 있었다. 관심이 있던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띈 녀석이 바로 이 <배트맨 허쉬>였다. 내가 히어로물을 좋아한다는 점(특히 배트맨, X-MEN, 스파이더맨!), 수 많은 소설 속에 만화책이었다는 점, 무엇보다 미국 히어로물의 정식 한국어판이라는 점 등등등, 이 책이 내 눈에 띄지 않을 이유가 오히려 적었다1.

<배트맨 허쉬>의 배트맨은 과묵하다. 가뜩이나 별로 없는 대화를 제대로 끝내는 것도 드물다. 배트맨의 대사는 대부분이 독백으로 처리되며, 이는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어둠을 반증한다. 캣우먼과의 로맨스가 지지리도 진도를 못 나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둠을 없애기 위해 빛을 선택하는 다른 히어로들과 달리 더 강한 어둠을 자초하는 히어로. 아, 이게 배트맨의 매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배트맨 허쉬>는 썩 친절하지 않은 작품이다. <배트맨 허쉬>는 배트맨 시리즈의 총집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배트맨의 라이벌들이 대거 출연하지만, 스토리 진행과 시리즈물 등의 이유로 자세한 이야기까지 풀어주지 않는다. 거기다가 <저스티스>2에서 인연을 맺었다 하는 슈퍼맨3까지 등장해주니, 어지간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이놈들은 도대체 뭐야!'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최근에 안 사실인데, '배트맨에 나오는 악당들하고 슈퍼맨에 나오는 악당들하고 싸우면 어떻게 될까?'라는 식의 궁금증은 이미 널리 퍼져 있는지, 이미 이런 세계관이 미국 히어로물에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사실 <저스티스>에 대해 몰랐던 나로선 배트맨 시리즈에서 슈퍼맨이 나와서 살짝 당황했었다.

짐 리의 그림은 '도대체 이걸 그리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들었을까'라는 걱정이 들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 있고, 스토리 전개 또한 매우 흥미진진하다. 보통 알려진 영웅 vs. 알려진 악당 사이의 대결이 주인 히어로물에서 정체 불명의 악당을 쫓는 탐정물의 성격이 짙은 <배트맨 허쉬>는 액션과 함께 배트맨의 또 다른 장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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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릴 때 X-MEN을 처음 만화책으로 보고 너무너무 갖고 싶고 엔딩을 보고 싶어 여기저기 뒤져봤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정식 한국어판이 아니었나? [Back]
  2. 거기다 당황스럽게도 <저스티스>는 시공사에서 출판했다. [Back]
  3. 당신이 아는 그 슈퍼맨이 맞다! 신문기자! 클라크! 심지어 루이스도 나온다. [Back]
2008/08/15 15:28 2008/08/1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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