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 오영욱 지음/예담
여행작가, 일러스트레이터, 건축가 오기사가 그림으로 쓴 여행 스케치. 바르셀로나를 거점 삼아 저가 항공을 활용하여 여행한 16개국 50여 개 도시의 기록을 담고 있다. 각 나라에서 마신 커피와 특별하지 않아서 더욱 특별한 하루를 스케치북과 카메라에 담았다.
오기사의 전작인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가 여행기를 가장한 스페인 생활의 적응기記라고 한다면, 이번 작품인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는 한결 가벼워진 스페인 생활기 + 주변 도시 여행기라고 할 수 있겠다. 가벼워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부연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이 그려졌던 전작과 달리 이미 익숙해진 곳에서의 생활과 여행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내용이든 느낌이든 조금 힘이 빠지고 부드러워진 느낌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전에 진지했던 책의 주제가 가벼워졌다거나 하는 뜻은 아니란 얘기다. 오히려 한결 편해진 생활 속에서 그의 아픔과 외로움은 더욱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한국에 있을 때와 똑같은 사랑과 이별의 아픔은 물론, 외로움이나 괴로움 같은 소소하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들까지도.
이래저래 말이 많아도 여하튼 고작 지구라는 작은 행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일 뿐이다. - p.138
그렇다보니 이 책의 내용은 여행기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분명히 배경은 유럽, 혹은 미국의 어느 곳인데도 오히려 집 앞에 있는 카페에서 끄적거린 소소한 일기 같은 느낌까지 든다. 여행이 주는 처음의 당혹감이나 설렘 같은 것들이 한꺼풀 벗겨지고 나니, 사람 사는 곳은 어느 곳이다 다 비슷한 것이라는 별 것 아닌 명제가 다시금 확인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어느 곳에 있든 고작 지구라는 작은 행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한결 편해진 이야기들 속에 오기사 특유의 화풍으로 스케치 된 건물들과 재조합된 사진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디에 있든 우리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깨달음 아닌 깨달음은 그냥 덤이고.
그저 그곳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해하고 어느 화창한 날 고대와 중세와 근대의 길을 걸으며 뿌듯해하며 새로운 만남에 많이 설레고, 다시 찾아온 이별에 조금 슬퍼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행복해하면 될 뿐이었다. - p. 356
라이어 게임 roots of A -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학산문화사(만화)
'LIAR GAME'에 출전한 전직 천재 사기꾼 아키야마 신이치의 젊은 날을 그린 표제작을 비롯, 사상 최강의 점술 '삼상복술'을 쓰는 점술사가 어려운 사건에 도전하는 '삼상(三相)', 경이적인 다트 천재가 미래를 걸고 승부에 임하는 '나인 다트' 등, 읽는 재미가 넘치는 단편 6편이 수록되었다. 'LIAR GAME', 'ONE OUTS'를 낳은 귀재, 카이타니 시노부의 정수가 펼쳐진다.
<라이어 게임>의 작가인카이타니 시노부의 단편 모음집. <라이어 게임 2>에서 아키야마와 카츠라기 료 사이의 갈등 요소를 위해 각색되어 그려졌던 아키야마의 대학시절 이야기와 다트 천재의 이야기인 <나인 다트>, 1년 후에 자신이 죽을 것을 알게 된 천재 점술가 키류 아스카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여행하는 도중에 마주치는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야기, 연인들의 이야기인 <@러버즈>, '화실 일기' 풍의 애견 이야기 등 6편의 단편이 들어가 있다.
이 작가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모두 희망에 대한 것이다. <라이어 게임> 본편은 스토리 전개나 난이도는 <도박묵시록 카이지>급이다. 카이지가 끝없는 인간의 욕망, 근본적으로 추한 이기심 따위를 그리는 반면, 라이어 게임은 그와 반대로 신뢰를 강하게 반증하면서 게임을 진행한다. 본편의 프롤로그 격인 <라이어 게임 roots of A> 역시 인간의 마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려 노력하고, 키류 아스카의 이야기들 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어필한다. <@러버즈>는 색깔이 조금 다른 사랑 이야기지만 역시나 사랑과 인연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창해
주인공 나카노가 어느 날 갑자기 7년 전 헤어졌던 연인 사야카의 전화를 받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사야카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이 없다고 고백하며, 나카노에게 아버지의 유품에서 나온 지도 한 장과 열쇠를 근거로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찾으러 가는 데 함께 가주기를 부탁한다.
나카노는 7년 만에 옛 연인인 사야카의 전화를 받게 된다. 남편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사야카. 뜻밖에도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어졌다는 것, 최근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 중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지도와 열쇠(로 보이는 것)를 발견했다며 함께 그곳까지 찾아가 달라고 부탁한다. 왠지 그곳에 가면 자신의 과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얼마 전에 <유성의 인연>을 보고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자마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라는 도전적인 제목과 으스스한 풍경의 표지 그림에 끌려 왠지 모르게 앞뒤 안 가리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7년만의 옛 연인과의 재회, 의미를 알 수 없는 부탁. 어쩐지 3류 멜로 같은 분위기가 수수께끼의 그 곳에 도착하면서 180도 바뀌게 된다. 사람이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위치에 덩그러니 놓여진, 모든 시계의 시각이 11시 10분으로 고정된, 마치 유령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집. 나카노와 사야카가 그 곳에 발을 딛는 순간 나도 함께 그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집의 모양과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삐걱거리는 바닥의 소리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듯한 두려움 속에서 두 캐릭터와 함께 그 곳에 펼쳐져 있는 각종 증거들을 통해 추리되어지는 그 집과 사야카의 과거들을 하나씩 따라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점점 커지더니, 마지막 추리 직전에는 온 몸에 한기를 느끼며 '이 작가는 천재다!'라고 외쳤다.
<유성의 인연>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이 책에서 드러난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매력은 증거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추리 소설, 혹은 영화들의(혹은 '반전' 타이틀을 달고 있는 모든 것들의) 가장 큰 매력은 증거를 숨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든 증거를 캐릭터와 독자(혹은 관객)가 동일한 수준에서 제시되었을 때, 독자는 진정으로 작가에게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모든 추리가 완료 되었을 때 느끼는 재미와 공포가 진정한 추리물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한 줄, 한 소절도 허투루 읽을 수가 없다. 집의 구조와 모양에 대한 묘사, 가장 큰 단서가 되는 '유스케'의 일기, 캐릭터의 대화에서 전해지는 모든 분위기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비로소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은 정말이지 천 피스짜리 직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출 때의 희열만큼이나 거대하다.
이 책의 도입부를 읽을 때에는 얼마 전에 읽었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있던 <악몽>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과 그것을 찾아가는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보면 결론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악몽>이 청춘성장소설 같은 느낌이었다면,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훨씬 어두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추리물로서의 재미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가 이 사건 속에서 아동 학대라는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녹여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대를 이어 불행을 빚어낸 아동 학대 문제가 추리라는 장르와 어우러지면서, 특별히 잔인하거나 무서운 묘사가 없음에도, 오히려 그런 것들이 주는 것보다 더 한 공포를 느끼게 만든 것이다.
오랫만에 정말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다. 히가시노 게이고, 이 작가를 이제까지 간과한 내 자신에 반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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