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대체 이 내용이 1쿨로 제작된다는 게 말이 안된다. 사건과 갈등 구조는 많이 벌여 놓았으나 제대로 해결된 건 하나도 없음. 역시나 '파리편'은 1기와 2기 사이의 브릿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다행인 건 곧 3번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나올 예정이라는 것. 설마, 생각 있는 감독이라면 이렇게 끝낼 생각은 아니었겠지, 당연히.
서태지 8집 - Atomos - 서태지 노래/서태지컴퍼니 서태지, 여덟 번째 소리를 완성하다. 090701 서태지 정규음반 'Seotaiji 8th Atomos'가 7월 1일(수) 드디어 발매된다. 지난 7월, 4년 반 만에 발매한 8집 첫 싱글을 발표하며 침체된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의욕적으로 활동을 해오고 있는 8집 활동의 그 마지막 장이 정규음반의 발매와 함께 시작되고 있다.
7집 이후 대장은 참으로 많은 소리를 찾아 해맸을게다. 생각해보면 7집 때의 사운드와 8집의 사운드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변화.
네이처 파운드라. 리믹스를 제외한 곡 리스트가 'MOAI'로 시작해서 '아침의 눈'으로 끝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렸다. 사실 리믹스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곡이 COMA [NATURE]이기 때문에, 어차피 같은 맥락.
MOAI. 왠지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온 사람의 여행기라는 느낌. HUMAN DREAM. 밝음 속에 슬픔을 내포시킴으로써 감정이 배가된다. 이거 가사 잘 들어보면 무지 슬픈 내용. T'ikT'ak. 베스트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래도 앨범 중에서 가장 긴장감을 잘 끌고 가는 노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BERMUDA [TRIANGLE]. HUMAN DREAM과 같은 느낌. JELIET. 곡의 흐름상으론 5집에서의 TAKE FIVE 같은 느낌. COMA. 현실에 대한 비판. 잘 들어보면, 슬픈 비판이다. 듣고 있으면, 화가 나면서 슬프다. REPLICA. 앨범에서 가장 헤비한 곡. 스트레스 많이 받을 때 틀어 놓는다. 아침의 눈. HUMAN DREAM, BERMUDA [TRIANGLE]과 비슷한 주제다. 성장, 순수의 상실. 어른이 되기 싫은 대장의 적극적인 저항인가.
리믹스 곡들은 또 완전히 다른 느낌들이다. 개인적으로 베스트는 COMA [NATURE].
모든 곡이 타이틀화되어서 뮤직비디오 하나를 고르기 힘드니, 그냥 가장 최근에, 이 앨범 공개되면서 나온 뮤직비디오만.
원작 <라이어 게임> 만화를 처음 접했을 때, 아무래도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떠올랐다. 우연히1 궁극의 심리, 두뇌 싸움에 주인공이 참여하게 된다. 이기면 엄청난 상금을 얻을 수 있지만, 패하는 경우엔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High Risk, High Return이라지만, 그 액수가 억 단위를 가뿐히 넘나드는 가히 천문학적인 수치이다. 여기까지는 <라이어 게임>과 <카이지>가 거의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카이지>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게임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말 그대로 두뇌 싸움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라이어 게임>에서는 그 두뇌 싸움을 넘어선 것이 좀 더 있다. <라이어 게임>에 나오는 게임들이 인간의 '불신'을 근간에 두고 있다는 것.
사실 칸자키 나오는 라이어 게임과는 절대 어울릴 수도 없고, 1회전도 이길 수 없는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캐릭터이다. 상대방을 속여서 1억엔을 빼앗아 오는 것이 주 목적인 게임과, 길에서 100엔만 주워도 경찰서에 신고하는 온 몸과 표정에 '정직'이라고 써놓고 다니는 사람의 만남. 모두가 칸자키 나오의 패배를 예견했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칸자키 나오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키야마를 만나기 전까지.
피라미드회사에 속아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아키야마는, 심리학이라는 전공을 살려 거꾸로 피라미드회사를 상대로 사기를 쳐, 회사를 파산으로 몰아 넣은 경력이 있는 사기꾼(이라기엔 조금 착한(?) 면이 있지만.)이다. 말 그대로 이 드라마에서 아키야마는 칸자키 나오를 도우면서 게임의 돌파구를 찾아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매와 같은 눈으로 상황과 룰을 판단하고 최적의 루트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 길로 가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요리하는 데에도 능숙하다. 과연, 천재 사기꾼.
자, 그럼 사실 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데에는 아키야마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실제로 드라마의 초, 중반부까지 칸자키 나오의 바보스러우리만치 정직한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만들 지경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다가 절대로 회생할 수 없는 지경까지 처박히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키야마가 비상한 방법으로 구해주기는 했지만. 여하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움도 안되는, 오히려 방해만 되는 히로인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한다. 정말? 정말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 반드시 누군가는 불행해지고, 누군가는 행복해져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히로인은, 결국 밝혀낸다. 라이어 게임에 숨겨진 진실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그것은 믿음. 너무나 쉽고 간단한 것이어서 보는 이가 다 맥이 풀릴 이야기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믿기만 한다면 심지어 라이어 게임 안에서도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지능과 사회성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어린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이유이다. 왜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불행해지는지, 어린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거짓말을 통해 남의 큰 돈을 빼앗는다고 해서, 그게 진정 행복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큰 돈을 얻을 수 있는 '복권 상금'조차도 받을 후에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거짓말까지 하면서 얻은 것에 얼마나 큰 행복과 의미가 있을까?
드라마는 11편으로 끝나기 때문에, 원작의 중간 - 라이어 게임 3회전 까지의 진도까지만 그리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도대체 어떻게 끝을 내려나,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비밀을 밝혀주면서 게임에서는 주인공들이 궁지로 몰릴 때마다 돌파구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대주제를 잊지 않고 잘 밀고 나가주었다. 이 '믿음'의 힘은 점점 확대되어 원수로의 용서로까지 번져갔고, 모두가 칸자키 나오에게 동화되어 가는 모습은, 극단적인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훈훈하기까지 하다.
히힛.
아, 그러고보니, 이 드라마의 명대사는 이거라고 볼 수 있다. 자기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복수의 대상을 앞에 놓고, 칸자키 나오의 설득으로 복수를 하느냐 용서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한 아키야마.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악인 스스로, 스스로를 용서받을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 표현하게 한 것. 정말 이 대사 들을 때, 소름이 쭈뼛 솟을 정도였다.
俺はお前の言葉なんか信じない。俺の言葉を信じるか信じないかはお前が決めろ。(나는 네 말을 믿지 않아. 내 말을 믿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라.)
덤. 극 중 라이어 게임 사무국(LGT)의 집행인(?), '에리エリー'역으로 분한 키치세 미치코吉瀬美智子라는 여배우. 보는 내내 '혹시 채연이 일본 드라마에 진출했었나? 싶을 정도로 닮았다. 검은 정장에, 절대 흥분하지 않고 늘 냉정하고 차가운 반응으로 일관하는, 얼음마녀 스타일.
덤2. 리뷰 쓰기 전에 정보를 좀 얻어볼까 하고, <라이어 게임> 홈페이지를 찾아들어갔더니 시즌 2와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반갑긴 한데, 원작과 다르게, 하지만 정말 주제를 잘 살린 스토리로 완벽하게 끝냈으면서 어떻게 시즌 2를 이어갈 지 궁금하구먼. '시즌 2'라고 하는 걸 보니 <강철의 연금술사>처럼 리메이크를 하려는 건 아닌 듯 한데... 게다가... 저거, 배경에 있는 저 할아버지(?)... 아키야마 아니지? 그렇지? 왜 저렇게 된거야! ... 뭐, 그래도 일단 기대는 된다. 두근두근.
YB (윤도현밴드) 8집 - 공존(共存) - 윤도현 밴드 노래/로엔 2006년 8월 발표한 7집 'why be' 이후 2년 7개월 만에 발매되는 yb의 신보. yb가 바라본 세상과 사회에 하고 싶은 거침없는 이야기와 투박한 사랑 이야기, 지루하고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일상 이야기까지 다양한 yb의 현재가 담겨 있다.
공존共存이란 말은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가. 함께 있는 것. 여기에서의 '함께'는 단지 사전적인 의미-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를 넘어선다.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서로 도우며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의미를 더하는, '함께'있는 것, 공존. 그러니 이 말은 아름답고 조화롭지 않을 수가 없다.
윤도현 스스로도 말을 아끼는, 앨범 발매 이후의 여러가지 사건들은 아직도 의혹이 많지만,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들이 정말, '좌파 밴드의 출연을 막으라'고 지시를 했는지 어땠는지를 떠나서,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은 이 앨범의 노래들을 제대로 들어나 보고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일까.
무작정 '더러운 세상이니 들고 일어나, 모든 것을 처부수자!'는 얘기라고 있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오히려 국민 밴드로, 오버 그라운드에서의 입지가 굳어진 YB가 그런 얘기를 쉽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 자체가 오산이다. '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내용과 표현에 차이가 올 수 밖에 없다. 그건, 그들이 가진 그만큼의 파급력에 따른 책임감 또한 막중하기 때문이다. YB의 이번 앨범, <공존>에 있는 곡들은 오히려 희망을 담고 있다. 사랑 노래를 잠시 제껴두고, <깃발>은 얼핏 과격해 보이지만 참 꿋꿋하다. 조금 확대 해석하면 무폭력주의자의 굳은 심지 같다. 화자가 노래 속에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깃발을 세우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뿐이다. 탈취자일까, 권력자일까. 누군가 와서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려 해도, 다 가져가라며 그저 묵묵히 깃발을, 자신의 굳은 의지만을 지키고 있다. 그것을 누가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인가. '무너진 지붕 위에도 해가 뜨게'만드는 그 굳은 심지를. <후회 없어>도 <깃발>과 동일선상의 곡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아무리 누가 뭐라 하고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지나온 날들에 대한 후회가 없이, 떳떳하다는 이 곡의 화자는 그야말로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학업 부담으로 자살한 초등학생의 유서를 보고 만든 곡이라는 <물고기와 자전거>. 이 곡에서 화자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와 자전거처럼, 자유로운 삶과 빛을 찾고, 다시 한 번 더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슬픈 것은, 그 초등학생은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에서 그 길을 찾았다는 것이지만.
조금 과격한 곡을 찾자면 <88만원의 Losing game>과 <Talk to Me> 정도겠다. <88만원의 Losing game>은 참 어려운, 힘들고 희망 없어 보이는 '88만원 세대'의 모습과 속앓음을 그대로 노래에 드러냈다. 어떤 기사에서는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88"을 지적하기도 하더라. 글쎄, 이정도는 언어유희라고 봐줘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솔직히 얼마나 절묘하게 어울리냔 말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Talk to Me>는 악플러에 대한 이야기들. 그런데 재밌는 건 악플러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 이외에는 참으로 공손하게 "제발 그만해요."라면서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뭐랄까, 철없이 날뛰는 야생마 같은 건달놈을 다스리는 나이 지긋한 양반 같다고나 할까.
결국 대부분의 메시지들은 'X같은 세상, 갈아 엎자.'가 아니라 '힘들지만 우리 열심히 살아보자.'는 내용들이다. 난 이렇게 힘든 시기에 그래도 힘내자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툭툭 어깨를 쳐주고 지나가는 YB가 참 고맙다. 조금만 더 힘내야지, 참 더러운 꼴이 많이 보이지만, 그래도 힘을 내야지. 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것이 고맙기만 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사랑 노래들에 대한 코멘트. 음색은 기존의 <사랑 two>, <잊을게>, <너를 보내고>들과는 조금 다르게 약간 거친 느낌이지만, 그 거칠음이 슬픔을 배가시킨다.
Track 1. Millimicron Bomb
2. 88만원의 Losing game
3. 깃발
4. 아직도 널
5. 편지
6. 후회 없어
7. 無
8. 물고기와 자전거
9. Talk to me
10. Stay alive
11. 꿈꾸는 소녀 two
12. 엄마의 노래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 최갑수 지음/예담 시인이자 여행 작가로 활동해온 최갑수의 포토에세이. 10년 동안 낯선 길을 떠돌며 기록한 글과 사진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우리가 세파라고 지칭하는 그 모든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포착해 낸 삶의 비경과, 그 사이로 잠시 잊고 있었던 추억과 꿈을 반추하는 글들이 담담하게 흐른다.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그런고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속았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책의 소개글 어디에도 이게 여행기라는 얘기는 없었다. 단지 온라인 서점의 분류가 그러할 뿐. 게다가 처음에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것도 딱히 이 책이 여행기여서는 아니었다. 그냥 제목이 마음에 들었었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라고 강요하고 훈계하는 게 아니라,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이란다. 아, 온전히 나를 위해서만 살 수는 없는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이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아준 것이랄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찌나 위로가 되든지.
느낌으로 책을 사는 나는 작가 이름을 몇 외우지 못하는데, 이 책의 저자인 '최갑수'씨의 이름은 우연히 쉽게 외우게 되었다.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것 두 권을 찜해놓고 있었다. 약간 흐린 듯한, 시쳇말로 칼초점이 맞은 사진은 아니더라도 왠지 한 번 더 보게되는 사진들 속에 적혀 있던 짤막짤막한 몇 줄, 조금 긴 것은 몇 단락의 글들이 신기하게도 내 마음을 유혹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두 책의 저자가 같았던 것이다!1 오, 세상에. 이건 이 작가와 나의 운명 같은 만남인가! 그렇다보니 작가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외우지 않을 수 없었던게다.
길, 여관이나 모텔, 골목 등을 좋아하는 최갑수씨는 말 그대로 여행에 중독된 듯 한 사람이다. 아니, 중독을 떠나서, 일전에 유성용씨는 <여행생활자>를 통해 책 제목을 그대로 신조어로 만들어 버렸는데, 저자인 유성용씨를 제외한다면 최갑수씨야말로 진정한 여행생활자라 할 수 있겠다. 보통 여행의 특별한 목적이 담긴 여행기가 아닌, 단지 여행이 바탕에 깔린 에세이나 포토집에서 볼 수 있는 감성이나 글이 아니기 때문일게다. 그저 평범한 이야기들이 주욱 이어진다. 여행이라는 환경 아래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사건, 사고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왠지 최갑수씨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 일들이 바로 집 앞에서, 옆 집 아저씨와 함께 벌인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미 여행이 생활에 녹아든 탓일게다. 그렇다보니, 집 앞에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나가는 사소한 일상조차도 최갑수씨에겐 여행이 되어버린다. 여행과 생활의 공존, 혹은, 동질화.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하물며 여행지에서 쓴 에세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이건 그냥 에세이다. 어느 여행생활자의 일기.
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밝은세상
주인공 폴 페레뮐터가 화자로 등장,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으로부터 일 년 전 그가 뜻하지 않게 겪어야 했던 '모험'에 대해 들려준다. 한때 죽고 싶을 만큼 절망감에 처했던 남자가 어떻게 그 상황을 헤치고 나왔는가에 대한 술회 속에, 인간의 삶과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다.
한 남자가 있었다. 폴 페뤠밀터.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작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식을 가질 수 없던 데다가 도저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아내와 아내의 집안. 결국 이어진 이혼, 기르던 개의 죽음. 마치 세상은 작정하기라도 한 듯 이 남자를 철저히 홀로 버려두었다. 고작 '24센티미터'짜리 문학적 성취는 얼마나 하찮게 보였던가.
그는 그럴듯한 유산 하나 남겨주지 못한 아버지를 원망했다. 거창한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의례 주고 받았을 법한 사사로운 것들이었다. 낚시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낚시 여행을 갔었기에 아들과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낚시 여행에서 호수에서 실종되었다.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과 분노가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페뤠밀터는 모든 것을 잃은 순간,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의 여행의 종착역은 아버지가 실종된 플라망 호수였다.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호수, 거대한 아버지의 무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버지의 옛 친구 잉거쇨 씨의 도움을 받아, 생전 아버지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의 목숨을 건 모험을 시작한다. 오직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폴 페뤠밀터의 자서전 형태로 쓰여진 이 책은, 결국 책으로써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사색하는 것 만으로는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고작 '24센티미터'짜리 글을 써 내려가면서도 늘 그는 누구와도, 심지어 그의 아내와도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고,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과 진정한 나에 대해서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이 <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인 이유도, 그 때문이렸다.
영제: The Girl Who Cut Time 원제: 時をかける少女 감독: 호소다 마모루 출연: 나카 리이사, 이시다 타쿠야 제작사: 매드하우스 배급사: CJ 엔터테인먼트 상영시간: 97분 개봉일: 2007.06.14
마코토. 17세. 코스케, 치아키와 함께 중학생 때부터 삼총사로 지냈다. 방과 후엔 으레 세명이서 함께 야구장에서 야구를 하고, 성적은 고만고만, 친구 관계도 원만. 새삼스럽게 불행하다거나 힘들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은 활발하고 평범한 소녀. 불만이라면 최근에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 둔 푸딩을 동생이 먹어버린 것이나, (일본어 발음으로) 나이스데이인 7월 13일(ななーいちーさん)인데도 쪽지 시험에 요리 실습 때 기름이 튀고 지나가던 길목에서 왠 남자애게 날아든 것 정도? 그래도 괜찮아, 이정도로 뭘. 이라며 웃는 소녀에게 우연히 타임 리프 능력이 생겼다. 적당히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그 발견은 아주 우연히 시작되었다. 화학실에 선생님 심부름으로 갔다가 넘어지면서 무언가 부딪혔다. 별 일 없는 줄 알았는데,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내리막길인데다 전철이 들어오고 있다. 절체 절명. 설마 이대로 죽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죽는다. 라고 생각하는 순가, 그녀가 서 있는 시간은 기차가 돌아오기 바로 직전의 내리막길. 멍한 나와 부딪힌 아주머니, 그리고 아무일 없이 지나가는 전철과 사람들.
타임 리프 능력이 생긴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시험삼아 동생이 푸딩을 먹어버리기 전으로 돌아간다. 맛있어, 맛있어!라며 푸딩의 맛을 음미하고, 지각하지 않을 즈음에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친다. 쪽지 시험은 당연히 100점이고 (다시 돌아가서 시험을 보면 되니까!) 기름이 튈 게 뻔한 요리는 친구에게 부탁하고 마코토는 슬쩍 빠진다. 길을 가다 남자애가 날아드는 순간엔 멋진 재주넘기로 피하고, 용돈이 떨어져도 용돈을 받는 날로 돌아가면 되니까 아무 걱정도 없고! 이 얼마나 완벽한 하루란 말인가!
그야말로 소소한 행복을 위해 타임 리프 능력을 사용하는 마코토에게, 이모 카즈야는 말한다. "그만큼 누군가 손해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마코토는, 그리고 관객들은 코웃음을 친다. 시간 여행이라는 거대하고 작품으로서 매력적인 작품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일까? 그들이 말하는 시간 여행 패러독스라거나, 평행 우주 따위의 것들에 익숙해져서인지, 우리는 타임 리프 능력으로 고작 그 정도에 행복해하는 마코토가 바보스럽기까지하다. 그리고, '설마, 그정도로 무슨 일이 생기려고?'라고 생각한다. 다만, 후배의 고백을 받은 코스케 때문에 치아키와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치아키에게 받은 고백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려 그 고백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 게, 마코토의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져 있을 뿐이다. 우린 언제까지나 영원할 친구니까, 사랑은, 부담스러우니까. 그녀가 생각하기에 아주 조그마했던 감정의 응어리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삶은 (그 전에도 쾌활했지만 이제는 좀 더) 쾌활하고 행복하고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카즈야 이모의 가볍지만 묵직한 교훈은 이내 현실이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소소한 행복을 위해 아주 조금의 시간을 돌렸을 뿐인데, 대신 요리를 맡겨 기름을 튀게 한 친구는 다른 친구들에게 이지메를 당하고, 결국 죄 없는 다른 친구가 다친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을 사건이 커지고 커져, 코스케와 후배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소녀는 운다. 그 자리에 앉아서, 가장 친한 친구와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된 후배의 죽음을 눈 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주저 앉아 울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는 '멈춰, 멈추라고!'라고 끝없는 눈물과 함께 외쳐댔지만, 혹시 '그 때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 내가 죽었다면 너희가 죽는 일은 없었을텐데, 라는 자책감. 그 때, 홀연이 나타난 멈춰버린 시간의 세계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소녀를 더욱 슬프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큰 잘못을 깨닫는다. 소소한 행복을 위해 장난 친 모든 시간들보다 더욱 슬픈, 감정의 만남과 표출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린 것. 차라리 그 때 치아키의 고백을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걸. 아니, 차라리 거절하더라도 그 때 그냥 있었어야 했어. 하지만 그녀는 시간을 되돌려 그것을 없는 일로 만들었다. 결국, 정상적으로 드러날 뻔 한 감정은 마코토의 속에서 삐뚤어진 채로 가라앉을 수 밖에 없었고, 그녀가 허겁지겁 그 감정을 온전히 찾으려 할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돌아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마코토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되돌렸던 걸까. 지각하지 않으려고, 쪽지 시험을 잘 보려고, 코스케에게 고백하는 후배를 도와주려고... 하지만 결국, 그녀는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한다.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넌, 만나자고 한 시각에 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만나러 달려가잖아?"라고 카즈야 이모가 등을 다독여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게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지라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건널목의 그 곳에서 그 날, 마코토는 소녀로서의 죽음을, 어른으로 가는 성장을 선물받았던 것이다.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Time Waits for No One.
- 未来で待ってる。(미래에서 기다릴게.) - うん、すぐ行く、走っていく。(응, 금방 갈게. 달려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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